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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기독교 실재론 - 코넬리우스반틸

by 운영자 2022. 2. 5.

기독교 실재론 - 코넬리우스반틸



변증학 / 코넬리우스반틸 - 제2장 기독교 실재론


 


내용요약


 하나님과 실재를 동일시 생각한다. 실재 또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지식과 윤리에 대한 견해를 포함한다. 지식과 윤리에 관한 우리의 견해는 존재에 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견해를 기초로 하여 그 위에 세워진 것이며, 결국 지식과 윤리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존재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포함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는 지식과 윤리 그리고 존재에 대한 완전한 체계를 제시 할 수 없다. 기독교적 철학과 비기독교적 철학의 차이는 영원한 하나와 여럭을 일시적인 하나와 여럿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관이 우리 사고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심에 어떤 비존재와 자신의 존재를 비교하심으로써 정의하시지 않는다. 어느 무엇, 심지어 비존재도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구체적보편성에 관한 개념을 도입한는 것을 유익하다고 선택한다. 철학자들은 하나와 여럿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명백하고도 엄청난 난관에 봉착하곤 했었다. 여럿은 반드시 그들 상호간에 어떤 연관이 되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연관되어 지는 것을 우리가 알수있는가. 그리고 연관성 없는 개별자로서 존재 할수 있는 것을 어떻게 알수있는가. 이러할 경우 여럿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지식체계로부터 추상화, 즉 추상적 특수성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 반대로 개별자를 파괴하지 않는 단일성을 어떻게 획득할수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 할 수없다고 확언한다. 이러한 문제를 도입한 이유는 구체적 보편자라는 개념이 가진 의미를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구체적 보편자를 소유하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서만 접근 할 수 있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를 통해서 뿐이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와 여럿을 위에서 설명한 방식대로 주장한다면 일시적인 하나와 여럿 또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은 어떤 비존재를 설정하여 놓으시고 그것과 자신을 비교하시어 자신에 관한 정의를 내리실 그러한 비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비존재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과 비 존재 사이의 관계와 인간과 비존재 사이의 관계를 맨 먼저 구분한다. 하나님께 있어서 비존재란 실로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비존재는 하나님이 개연적으로 활동하실 수 있는 활동의 바탕이 된다.

 

피조된 하나와 여럿은 그들 모두를 보살펴 유지시키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 되었다는 점에 있어 동등하며, 그들 모두가 그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시 동등하다. 피조된 우주에는 질서가 있다. 법칙, 단지 개별자들을 움직이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일반화 시킨 것에 불과하다. 최근의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우리는 이제껏 우리가 이야기해 온바 피조세계의 어떤 양상이 다른 양상들에 종속되는 관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위의 논의 세계들은 상위의 논의 세계를 예상하고 상위의 논의 세계들은 하위의 농의 세계를 회고한다. 


 우리가 제시해온 유신론은 그 자체에서 그쳐서는 안되며 반드시 기독론이 첨가 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가 피조물 전체에 임하였다. 인간은 사단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죄와 싸워 그것을 치유하는 힘을 이 세계에 집어넣으셨다. 이 치유적 사역은 그리스도 안에서 중심을 이룬다.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가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한 것은 하나의 원리로서가 아니라 인격으로서 존재하며, 그 인격은 영원한 인격이라고 대답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영원이란 말을 일시적인 것과 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일시적인 우주의 인격적 창조주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생성과 존재중에 무엇이 먼저냐는 질문에 생성이란 용어는 하나님께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야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생성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는 영원한 존재시다. 그리고 피조물이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생성 과정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말한다. 하나님은 시간자체를 하나의 피조물로 창조하셨기에 우주 시간적인 순서, 시간에 구속되지 않으신다. 


 우리는 성경에 기초를 둔 조직신학 속에서 발견되는 실재의 개념을 취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기초로 한다. 

 

 


논평


내재적 비평- 내부 모순점



 우리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전체적 그림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철학의 본성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전체적 그림과 비기독교적 사상을 더불어 비교한다는 것은 오류라 생각된다.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인 복음을 세상의 기준인 철학에 비교한다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삼위일체를 철학으로 논리로 이해 할 수 있다는 시도자체가 오류라고 생각된다.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주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본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해할 어떠한 학문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대상이라 생각한다.

 

 


외재적 비평- 복음의 눈



 인간의 뛰어난 학술적 논증과 철학들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가에 대한 의구심이든다. 철학으로 이해하려 연구와 논증을 거칠수록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말씀이다. 성경 말씀은 누구나 알 수있는 말씀, 믿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비유의 말씀이 있다. 복음은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 어떤 위대한 인간도 지식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지식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변증학자체가 철학자들의 질문에 대한 신학적 철학에 대한 답 변 아닌가. 현장에서 전도를 하거나 평신도가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 논리를 물어 볼 적에 과연 인간의 지식수준으로 철학적인 답을 제시해야 하는가? 본인은 믿음을 이야기 한다. 창조주께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이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기에 우리가 피조물이고, 그렇게 무지한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을 베푸신 분이 창조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대답한다.